글

훈련소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다 허약한 소나무 몇이 콜록거리며 쓰러졌고 연병장 가득 쌓인 눈을 치우느라 우리들의 전투화는 아침부터 젖어 있었다 모두들 양지로 떨어지는 풋풋한 햇살이 그리웠다 4발짜리 고문관을 위하여 그들은 전투화와 개머리판을 아끼지 않았고 팽팽한 사선 위로 튀어 오르는 타켓트가 누구인지를 아무도 묻지 않았다 그냥 필요에 의한 뇌세포의 반작용이었을 뿐 그들은 나의 가슴에 166의 숫자를 달아 주었고 나는 166번 훈련병 이외의 아무것도 될 수가 없었다 김용덕

그리움

그대여 나는 질퍽한 수렁 속에 한쪽 발을 담그고 그대를 기다립니다 나의 발은 덫에 걸려 피 터지고 속살 보이는데 그대여 그대는 저기 먼 산 바깥에 그냥 혼자 소나무로 서서 바라만 보십니까 어느 날은 갑자기 바람에 실려 온 그대의 자궁 속 엄마 같은 체취가 어지러운 나를 더 어지럽게 합니다 그대여 그대 향기에 나의 가슴은 타다 못해 이렇게 그리움에 멍이 드는데 그대는 보이지 않는 바람으로만 오시렵니까 어느 날은 뿌연 연기에 가려 그대가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런 날 나는 빠지지 않는 수렁 속에서 갈대처럼 목 만이 길쭉하게 자라 허전한 가슴 빈속으로만 우는데 그대는 그리움의 언덕 저편에서 무엇을 하십니까 김용덕

진달래

자유라도 잃었느냐 남들은 다 지천으로 웃고 있는데 무슨 그리움이 그리도 커 선지 같은 붉은 피 뚝뚝 토하느냐 누가 네 목을 조르더냐 왜 그리도 갈가리 찢어지는 숨 막힘의 소리로 헉헉거리며 등성이마다 아우성이냐 하늘은 푸르지 않느냐 네 귓볼을 스치는 바람의 냄새를 맡지 못하느냐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향긋한데 왜, 걱정으로 밤새 뒤척여 눈물 같은 버짐 피웠느냐 김용덕

떠들지 마라, 젊은 예수쟁이야

떠들지 마라, 젊은 예수쟁이야 어두운 골방 상처 하나 없는 고운 손으로 세상을 사랑한다 말하지 마라 젊은 예수쟁이야 떠들지 마라 배고픈 사람들을 위하여 한 끼를 굶어 본 적 없는 네 잘난 입속에 예수를 가두고 세상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마라 세상은 온통 고삐 풀린 바람뿐인데 주린 창자를 부여잡고 하루에도 열댓 번씩 바람 속에 까무러졌다 울먹이며 일어나는 어린 양들의 고달픈 일상이 젊은 예수쟁이야 보이지 않느냐 떠들지 마라, 젊은 예수쟁이야 김용덕

아들아 보아라

그리운 아들아 보아라 여름이 보이는 것 같구나 공장 갔다 돌아오는 까만 밤길에 개구리는 무슨 전쟁같이 우는구나 잘 지내고 있느냐 네 소식이 하도 그리워 까막눈인 나가 이렇게 연필을 들었다 한식날 네 아버지 무덤가에 머리카락 같은 풀들을 솎아내고는 떠나면서 못내 아쉬워하던 네 눈을 기억한다 아들아 보고 싶구나 내 니가 집으로 안 내려오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야 간다마는 그래도 한 달에 한두 번은 내려오거라 내 니가 어무이 보고 올라가면 싱숭생숭 아무것도 못한다는 거 다 안다 하지만 니 아버지 가신 뒤로 나는 니 하나만 하늘같이 바라보고 사는기라 그래 내 등이 이리 굽어도 나는 즐거운기라 이제 걱정 팍 집어던지라 해도 니는 아직도 내 옷고름 옆에서 코 흘리고 있는기라 김용덕

귀향

살아온 무게만큼 흔들리는 것일까 설이라 고향으로 돌아오는 밤 버스 사람들은 저마다 몇 분지 몇의 희망을 안고 돌아가는 걸까 젊은 몇몇은 한해 일들을 무슨 훈장처럼 떠벌여 대고 밤 버스는 자꾸 자꾸 빙판길에 흔들리는데 나는 얼마 만큼의 희망을 안고 돌아가는 것일까 창 밖 어두움 속으로 쌀밥 같은 송이 눈은 날리는데 김용덕

아, 나의 시는

그리워져 오랜만에 찾아든 친구 야학을 마치고 돌아와 피곤한 몸으로 누운 친구의 허름한 등을 보면 아, 나는 시를 쓸 자격이 있는가 나의 시는 시가 될 수 있는가 친구는 그래도 먹고 살만해 대학에 다니는 선생보다 나이가 많은 학생들을 말하고 배움에 목마른 월수 6만원 미싱일에 대해서 말하고 그래서 눈물 나는 수업 시간과 슬퍼서 버릴 수 없는 야학의 까만 눈들을 말하는데 아, 나의 시는 시가 될 수 있는가 무얼 찾는 치열함도 땀도 없는 나의 시는 김용덕

무엇이 우리를 이리 만드는 것일까?

선선한 여름 바람이 아버지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다 아버지의 등 뒤로 붉은 노을이 진지 오래고 아버지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저리도 골똘히 하시는 걸까? 죽어서까지 어긋나기만 하는 스물 둘 막내아들의 불안전한 장래를 생각하셨을까? 아니면 시집마저 불우한 탄촌으로 간 막내 누이를 생각하시는 걸까? 아니면 이북 어디메쯤에서 살고 있을지 죽었을지 모르는 지금은 오십 나이는 됐을 북에 두고 온 아들들에 대해서 일까? 나는 병실 창가에 서서 부어오른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만 보았다 어머니, 아버지는 살리고 봐야지요 어머니도 울고 나도 울었다 산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서러움과 울음의 연속일까 나는 그 날 저녁 내내 우리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느냐는 어머니의 말을 아침이 오도록 생각하고 있었다 무엇이 우리를 이리 만드는 것일까? 고달프게만 살아온 저물어가는 일흔 한 살 아버지의 생과 육십 평생 어머니의 생을 생각했다 무엇이 우리를 이리 만드는 것일까? 김용덕

벽

어제 죽지 못한 서러움으로 다시 사는 하루살이처럼 어제 밤 빠알간 빛에 반 쯤은 타버린 날개를 편다 어제 밤 불을 향해 가던 나의 날개가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히고 나는 쓰러지고 날개는 찢어졌다 찢어진 날개를 가느다란 두 팔에 얹고 다리를 들고 일어선다 창 너머엔 불이 있고 나는 또 날개를 편다 (삶이란, 수 없이 다가오는 벽돌을 깨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깨고, 나아가고 또 깨고, 그러면서 가는 것이다.) 김용덕

아침을 굶은 날

먹을 것 떨어져 아침을 굶고 자리에 힘없이 띵한 머리로 누운 날은 집으로 가고 싶다 그냥 그대로 스르르 눈을 감고 누으면 고향의 그 푸르른 파도와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이 나를 감싸고 아, 나는 어느새 고향으로 가는 차에서 내려 그리도 가고 싶었던 시골집 눈에 익은 신작로와 그 옆으로 펼쳐진 모래사장과 짠 바람과 마음 좋은 고향 아저씨를 만난다 골목을 꺽어 들어 무너진 담벼락에 너울진 호박 넝쿨과 문턱을 넘으면 아, 어머니 그리운 나의 어머니 성글한 눈과 덥썩 안아 오는 포근한 품속 먹을 것 떨어져 아침을 굶은 날은 그냥 그대로 집으로 가고 싶다 김용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