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지않아요 그대 목소리 옛날 같이 낭랑하게 들리지않아요 이러다가 돌아갈 것 같아요 당신을 따라 내 마음 초개같이 버리고 따라온 바람같은 시절이 이제는 부질없는 후회로만 남을 것 같아요 당신을 따라 어렵던 계절 따라 견디었지요 그 시절 쌓이는 슬픔마다 당신도 함께 걷고 있다는 위로 꾹꾹 접어 두고 속으로만 울었지요 1993년 8월 어느날 김용덕
잠 안오는 밤 밤 새 눈이 내린다 내 마음 어지러운 혼돈의 숲에도 눈이 뿌린다 나이가 들면서 마음이 자주 불안해진다 하나를 더먹어 내 나이 이제 스물 넷 오십의 반 고개를 올라서는데 아직도 나는 바람처럼 구르기만 할 뿐 나는 미치게 울고 싶다 1993년 1월 17일 저녁 김용덕
잠이 안와 뜬 눈으로 새우는 밤에는 어둠 새로 온갖 생각이 머리를 들쑤신다 작년 여름 징한 세상 폐암으로 돌아가신 이른 둘 아버지가 먼저 나타나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만 보시다 마지못해 가시고 가끔씩 수술자리가 아프시다던 예순의 어머니가 오셔서 30년 괘기 독으로 오른 붉은 손으로 나를 붙잡고 우신다 야야 내등이 이리 굽어도 니만 있으면 나는 즐거운 기라 카랑카랑한 눈으로 누이들도 나타나 아버지는 니 때문에 죽은기라 감기가 뜬금없이 암이 되나 니놈만 아니면 한 십년은 더 사셨을거다 핏대를 올리다 올리다 젯 풀에 꺾여 사라진다 술기운으로 잠 안오는 그런 날이면 잠 안오는 밤보다 푸석하게 부어오른 아버지 얼굴이 더 무섭고 그런 날이면, 정말이지 구들장 밑으로 들어가 벌레라도 되고 싶다. 김용덕
지는 노을이 소리 없이 붉다 사라져 가는 모든 것들 울며 발을 동동 구르며 마지막 집착의 한숨을 토한다 아! 나는 저물어 가는 길목 어디쯤에서 이렇게 긴 한숨을 짓는 것일까 1993년 9월 1일 김용덕 덧붙이는 말 이 시는 용덕이가 세상을 떠나기 4일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시입니다. 마치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이 시를 볼 때마다 그가 정말로 지는 노을을 보고 발을 동동 구르며 긴 한숨을 짓고 있는 것처럼 눈 앞에 보이는 듯 합니다.
떠나는 너야 어떨까마는 살아있는 사람들은 떠나는 너로 인해 잊지 못할 마음의 상처를 가진다 너를 데리고 벽제로 가는 아침 안개가 끼고 인연 없는 몇몇의 사람들 무심코 너를 볼 뿐이나 지나간 10년 동안의 세월 너와 함께 했던 사람들 후회와 그리움으로 뚫리는 가슴을 어찌 채우란 말이냐 얻을 것 없는 세상에 태어나 네가 남기는 것은 흘러가는 강물에 버려지는 한 줌 재와 너를 아는 사람들 가슴속에 쓸쓸한 기억 뿐 아름다운 기억은 아름다워서 더욱 가슴 아프고 살아있는 사람들 가슴속에 살아있는 기억들 잊는다고 잊혀질까마는 마지막 가는 길에 모두 다 가져가거라 너를 데리고 벽제로 가는 마지막 아침 아쉬운 기억만이 쓸쓸하게 바람처럼 가고 있다 김용덕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다 허약한 소나무 몇이 콜록거리며 쓰러졌고 연병장 가득 쌓인 눈을 치우느라 우리들의 전투화는 아침부터 젖어 있었다 모두들 양지로 떨어지는 풋풋한 햇살이 그리웠다 4발짜리 고문관을 위하여 그들은 전투화와 개머리판을 아끼지 않았고 팽팽한 사선 위로 튀어 오르는 타켓트가 누구인지를 아무도 묻지 않았다 그냥 필요에 의한 뇌세포의 반작용이었을 뿐 그들은 나의 가슴에 166의 숫자를 달아 주었고 나는 166번 훈련병 이외의 아무것도 될 수가 없었다 김용덕
그대여 나는 질퍽한 수렁 속에 한쪽 발을 담그고 그대를 기다립니다 나의 발은 덫에 걸려 피 터지고 속살 보이는데 그대여 그대는 저기 먼 산 바깥에 그냥 혼자 소나무로 서서 바라만 보십니까 어느 날은 갑자기 바람에 실려 온 그대의 자궁 속 엄마 같은 체취가 어지러운 나를 더 어지럽게 합니다 그대여 그대 향기에 나의 가슴은 타다 못해 이렇게 그리움에 멍이 드는데 그대는 보이지 않는 바람으로만 오시렵니까 어느 날은 뿌연 연기에 가려 그대가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런 날 나는 빠지지 않는 수렁 속에서 갈대처럼 목 만이 길쭉하게 자라 허전한 가슴 빈속으로만 우는데 그대는 그리움의 언덕 저편에서 무엇을 하십니까 김용덕
자유라도 잃었느냐 남들은 다 지천으로 웃고 있는데 무슨 그리움이 그리도 커 선지 같은 붉은 피 뚝뚝 토하느냐 누가 네 목을 조르더냐 왜 그리도 갈가리 찢어지는 숨 막힘의 소리로 헉헉거리며 등성이마다 아우성이냐 하늘은 푸르지 않느냐 네 귓볼을 스치는 바람의 냄새를 맡지 못하느냐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향긋한데 왜, 걱정으로 밤새 뒤척여 눈물 같은 버짐 피웠느냐 김용덕
떠들지 마라, 젊은 예수쟁이야 어두운 골방 상처 하나 없는 고운 손으로 세상을 사랑한다 말하지 마라 젊은 예수쟁이야 떠들지 마라 배고픈 사람들을 위하여 한 끼를 굶어 본 적 없는 네 잘난 입속에 예수를 가두고 세상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마라 세상은 온통 고삐 풀린 바람뿐인데 주린 창자를 부여잡고 하루에도 열댓 번씩 바람 속에 까무러졌다 울먹이며 일어나는 어린 양들의 고달픈 일상이 젊은 예수쟁이야 보이지 않느냐 떠들지 마라, 젊은 예수쟁이야 김용덕
그리운 아들아 보아라 여름이 보이는 것 같구나 공장 갔다 돌아오는 까만 밤길에 개구리는 무슨 전쟁같이 우는구나 잘 지내고 있느냐 네 소식이 하도 그리워 까막눈인 나가 이렇게 연필을 들었다 한식날 네 아버지 무덤가에 머리카락 같은 풀들을 솎아내고는 떠나면서 못내 아쉬워하던 네 눈을 기억한다 아들아 보고 싶구나 내 니가 집으로 안 내려오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야 간다마는 그래도 한 달에 한두 번은 내려오거라 내 니가 어무이 보고 올라가면 싱숭생숭 아무것도 못한다는 거 다 안다 하지만 니 아버지 가신 뒤로 나는 니 하나만 하늘같이 바라보고 사는기라 그래 내 등이 이리 굽어도 나는 즐거운기라 이제 걱정 팍 집어던지라 해도 니는 아직도 내 옷고름 옆에서 코 흘리고 있는기라 김용덕
살아온 무게만큼 흔들리는 것일까 설이라 고향으로 돌아오는 밤 버스 사람들은 저마다 몇 분지 몇의 희망을 안고 돌아가는 걸까 젊은 몇몇은 한해 일들을 무슨 훈장처럼 떠벌여 대고 밤 버스는 자꾸 자꾸 빙판길에 흔들리는데 나는 얼마 만큼의 희망을 안고 돌아가는 것일까 창 밖 어두움 속으로 쌀밥 같은 송이 눈은 날리는데 김용덕
그리워져 오랜만에 찾아든 친구 야학을 마치고 돌아와 피곤한 몸으로 누운 친구의 허름한 등을 보면 아, 나는 시를 쓸 자격이 있는가 나의 시는 시가 될 수 있는가 친구는 그래도 먹고 살만해 대학에 다니는 선생보다 나이가 많은 학생들을 말하고 배움에 목마른 월수 6만원 미싱일에 대해서 말하고 그래서 눈물 나는 수업 시간과 슬퍼서 버릴 수 없는 야학의 까만 눈들을 말하는데 아, 나의 시는 시가 될 수 있는가 무얼 찾는 치열함도 땀도 없는 나의 시는 김용덕
어제 죽지 못한 서러움으로 다시 사는 하루살이처럼 어제 밤 빠알간 빛에 반 쯤은 타버린 날개를 편다 어제 밤 불을 향해 가던 나의 날개가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히고 나는 쓰러지고 날개는 찢어졌다 찢어진 날개를 가느다란 두 팔에 얹고 다리를 들고 일어선다 창 너머엔 불이 있고 나는 또 날개를 편다 (삶이란, 수 없이 다가오는 벽돌을 깨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깨고, 나아가고 또 깨고, 그러면서 가는 것이다.) 김용덕
먹을 것 떨어져 아침을 굶고 자리에 힘없이 띵한 머리로 누운 날은 집으로 가고 싶다 그냥 그대로 스르르 눈을 감고 누으면 고향의 그 푸르른 파도와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이 나를 감싸고 아, 나는 어느새 고향으로 가는 차에서 내려 그리도 가고 싶었던 시골집 눈에 익은 신작로와 그 옆으로 펼쳐진 모래사장과 짠 바람과 마음 좋은 고향 아저씨를 만난다 골목을 꺽어 들어 무너진 담벼락에 너울진 호박 넝쿨과 문턱을 넘으면 아, 어머니 그리운 나의 어머니 성글한 눈과 덥썩 안아 오는 포근한 품속 먹을 것 떨어져 아침을 굶은 날은 그냥 그대로 집으로 가고 싶다 김용덕
수학 시간이었지 창밖으로 목련이 지고 있었으니까 아마도 봄이 꽉 찬 어느 날이었어 문제만 써 놓고 칠판만 멀뚱하게 바라보는 내게 선생은 이렇게 말했어 그만한 문제도 못 풀면 네 놈이 할 일은 배나 타고 공사판에서 벽돌이나 나르는 단순노동자 밖에 없어 아이들이 웃었고 난 얼굴이 벌게진 채로 자리로 돌아오고 말았어 그때 넌 왜 말하지 못했니 우리 아버지의 삶이 뭐가 어떠냐고 난 커서 아버지처럼 배를 탈 거라고 아버지의 삶을 비참하게 만든 건 당신이지 아버지가 아니라고 그 후론 난 교단에 올라 선 수학선생님의 통통한 배를 보면 사장님네의 배를 생각했지 그는 교단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우리 아비들의 삶 위에 올라서 있다는 생각이 든다. 김용덕
그래도 중학교는 가고 싶어요, 어머니. 원수처럼 가난하던 그 해 겨울로 가면 후우, 아버지는 한달 보름의 오징어 바리보다 긴 한숨을 무겁게도 내쉬었다 마루 끝으로 구르는 겨울 바람은 아버지의 흰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잡아 당기고 있었다 니가 가면 막내 등록금은 어떡하니 이불 장에 기댄 채 떨어지는 누이의 울음 위로 어머니의 말이, 깨진 유리처럼 박히었다 김용덕
겨울이 빨리 지나갔으면 자고 일어나면 세상엔 거짓말처럼 하얀 눈이 쌓이고 식구들의 가난한 골짜기에도 눈발이 날렸다 남들 벌 때 아버지는 무얼 하셨나요? 피난 이후 40년 쉴 새 없던 아버지의 노동이 갓 스물 누이의 울음 아래 떨어져 밟히고 있었다 철들어 식구들의 생계 앞에 허덕이는 아버지의 하루를 알고 있었지만 아랫목 열에 들떠 실같이 사위어가는 어머니의 신음 앞에 모두들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가련한 새끼들을 위하여 오래도 참으셨던 술, 술 속에 묻히고 아침이면 문 밖에 눈사람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 해 겨울은 참으로 더디게도 지나갔다 김용덕
막걸리 환희 식은 밥에 김치 조각에 찬물 아이야 네가 막걸리 서너 잔에 커 목트림 할 때 네 아빈 어제 저녁 싼 식은 밥을 찬물에 말아 김치 한 두 조각으로 끼니를 때우신단다 아이야 네가 푸른 솔 물고 있을 때 네 아빈 파돗 물에 젖어버린 환희를 필터가 드러나도록 피우신단다 연기 속에 묻혀 날아오른 너의 그 고민들은 차가운 새벽 공기를 뜨겁게 마시며 뱃길에 오르는 네 아비의 삶 만큼 진실했더냐 너의 그 많은 고민들은 누구를 위한 그것들이었더냐 아이야 네가 아직은 편안한 잠자리에 있을 때 네 아빈 따갑게 따갑게 내리 때리는 파도와 싸우신단다 그렇게 잡은 오징어의 반을 선주에게 내어주는 고통을 씹으시는 네 아빌 넌 생각해 본 적이 있니 하얀 연기 속에 묻혀 날아 올려버린 너의 그 많은 고민들은 과연 누구를 위한 그것들이었더냐 누구를 위한 그것들이었더냐 김용덕
잘 살아라 누이야 가난한 집안의 셋째로 태어나 어릿광대 막내에게 밥 한술까지 빼앗기던 착하게만 살아온 스물넷 누이야 잘 살아라 잘 살아라 원수처럼 가난하던 그 해 겨울로 가면 정말로 중학교는 가고 싶어요 어머니 하얀 옷의 간호원이 되겠다던 열네 살 소녀의 은빛 꿈이 기름과자처럼 부서지고 송화 날리는 봄이 오기도 전에 너는 마을 앞 싸구려 과자공장 저녁이면 기름 범벅 몸빼로 돌아왔지 군것질할 돈이 없었으므로 네가 집어 오는 기름과자가 기다려져 코흘리개 나는 학교가 끝나면 일찍이도 집으로 내달렸다 남들 다 가던 중학교도 못 나와 공장으로 십 년 기름때로 거칠어진 네 손을 누이야 부끄러워 말아라 돈 많아 대학 나온 귀한 집 딸내미들 매니큐어로 고운 손톱은 노동으로 굻어 온 네 손마디보다 아름답지 못하고 거리에 나서면 눈 아프게 화려한 옷들은 십 년간 기름때로 절은 네 몸빼보다 아름답지 못하다 누이야 니 비록 구석진 산골 탄촌으로 가지만 우리가 놀던 고향 산마루 칡꽃을 기억하지 칡꽃으로 그렇게 성기게 감고 뿌리 박혀 억세게 살아라 누이야 착하게만 살아온 스물넷 칡꽃 같은 누이야 김용덕